김치는 한국 사람에게 소울푸드에 가깝다. 그렇지만 김치를 하나의 음식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외국에서 김치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새빨간 양념을 입힌 배추김치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얼굴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의 밥상에서 김치는 재료와 계절, 지역과 집안의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음식이다. 배추와 무, 오이와 열무가 각기 다른 김치가 되고, 같은 재료도 써는 법과 국물의 양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된다.
나도 한동안은 김치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배추김치를 생각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건강을 생각해 매운 음식을 멀리하면서 배추김치를 전처럼 자주 먹지 않게 됐다. 속이 불편해질까 걱정되면 식탁에 있어도 젓가락이 쉽게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치로부터 완전히 절연할 수는 없었다. 밥을 먹을 때 김치가 주던 산뜻한 신맛과 아삭한 식감이 그리웠고, 국밥 한 그릇 앞에서는 김치가 빠진 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빨간 배추김치 바깥에 있던 김치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김치의 맛을 만드는 작은 발효자들
김치는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여러 재료를 더해 미생물이 발효하도록 만든 음식이다. 이 과정에서 류코노스톡, 바이셀라, 락토바실러스 계열을 비롯한 여러 유산균이 발효의 중심 역할을 한다. 유산균은 채소에 있는 당을 이용해 젖산과 여러 대사산물을 만들고, 그 결과 김치 특유의 산미와 향, 익어가는 맛이 생긴다.
연구에서도 김치 발효 과정과 시판 김치에서 다양한 유산균 군집이 확인된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하다. 발효식품에 살아 있는 미생물이 있다고 해서 그 식품 전체를 곧바로 의학적 효능이 입증된 ‘프로바이오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바이오틱은 특정 균주가 충분한 양으로 섭취될 때 건강상 이익을 준다는 근거까지 확인돼야 하는 더 엄격한 개념이다.
김치를 약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게 김치의 유산균은 오래된 밥상 속에서 발효의 시간을 맛보게 해주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도 김치가 살아 움직이는 발효음식이라는 사실은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풋풋하던 채소가 시간이 지나면서 새콤해지고, 국물에 미세한 기포가 생기며, 향이 깊어지는 변화 속에 유산균의 활동이 있다. 김치를 익히지 않고 차갑게 곁들이는 것은 이런 생생한 발효의 맛을 즐기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반대로 찌개나 볶음처럼 충분히 가열하면 살아 있는 균은 크게 줄어들 수 있지만, 잘 익은 김치가 주는 깊은 맛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 깍두기 — 아삭한 무와 시원한 국물
매운 배추김치가 부담스러워진 뒤 가장 먼저 다시 가까워진 것은 깍두기였다. 깍두기에도 보통 고춧가루가 들어간다. 집이나 제품에 따라 꽤 매울 수도 있다. 다만 양념이 비교적 옅고 맵지 않게 담근 깍두기를 고르면 배추김치보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깍두기의 중심은 매운맛보다 무의 식감에 있다. 잘 익은 깍두기를 베어 물면 단단한 무가 아삭하게 부서지고, 그 안에 밴 새콤하고 시원한 맛이 뒤따른다. 바닥에 자작하게 고인 국물도 빼놓을 수 없다. 밥에 한두 조각 올려 먹어도 좋고, 설렁탕이나 곰탕처럼 담백한 국밥을 먹을 때는 뜨거운 국물과 차가운 깍두기의 대비가 특히 잘 어울린다.
군고구마와 함께 먹기에도 좋다. 달고 포슬포슬한 고구마가 입안에 남을 때 깍두기 한 조각이나 국물 한 숟갈을 곁들이면 답답함이 가신다. 아주 맵지 않게 담근 깍두기라면 간식과 반찬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2. 백김치 — 고춧가루 없이도 분명한 김치
백김치는 이름 그대로 붉은 고춧가루 양념을 쓰지 않고 담그는 김치다. 절인 배추 사이에 무채와 쪽파, 마늘, 생강, 배 같은 재료를 넣고 맑거나 옅은 국물과 함께 익힌다. 집마다 재료는 다르지만 맵지 않은 대신 채소의 단맛과 향, 발효에서 오는 부드러운 산미가 앞으로 나온다.
백김치를 먹으면 고춧가루가 김치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배추의 아삭함도 있고 익은 김치의 새콤함도 있지만, 입안에 남는 인상은 훨씬 순하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아이나 외국인에게도 김치의 발효된 맛을 소개하기 좋은 출발점이다.
나는 백김치를 한입 크기로 잘라 밥 위에 올려 먹는 것을 좋아한다. 기름진 고기 옆에 두면 입안을 정리해주고, 자극적인 양념 없이도 반찬 하나가 충분히 또렷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동치미 — 김치에서 국물이 주인공이 될 때
마지막으로 권하고 싶은 것은 동치미다. 무를 통째로 또는 큼직하게 썰어 소금물에 담그고 파, 마늘, 생강, 때로는 배나 고추를 더해 익히는 물김치다. 매운 고추를 넣는 방식도 있으니 완전히 순한 맛을 원한다면 재료를 확인하는 편이 좋다.
동치미의 진짜 주인공은 국물이다. 차갑게 식힌 동치미 국물은 맑고 시원하면서도 발효에서 온 가벼운 산미와 무의 단맛이 있다. 느끼한 음식을 먹은 뒤 한 모금 마시면 입안이 환기된다. 겨울철 군고구마와 동치미 국물의 조합이 오래 사랑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목이 메일 듯한 고구마를 먹다가 차가운 국물을 마시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국수나 냉면의 국물에 동치미를 활용하기도 하고, 밥상에서는 작은 그릇에 국물째 담아 반찬과 음료의 중간처럼 먹는다. 김치는 씹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동치미가 기분 좋게 넓혀준다.
나에게 맞는 김치를 찾는다는 것
덜 매운 김치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깍두기의 매운 정도는 담그는 법에 따라 다르고, 백김치에도 마늘과 생강이 들어갈 수 있다. 동치미에는 매운 고추가 들어가기도 한다. 또 김치는 기본적으로 소금에 절여 만드는 음식이므로 고춧가루가 없다고 나트륨까지 적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건강에 좋으니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몸에 편한 종류를 골라 한 끼에 작은 접시만 곁들이고, 국물은 맛을 즐길 만큼만 먹는다. 속이 예민한 날에는 충분히 익어 신맛이 강한 김치나 마늘 향이 센 김치도 피한다. 김치가 몸에 맞는지는 종류뿐 아니라 익은 정도와 먹는 양에도 달려 있다.
매운 배추김치를 멀리한 것은 김치를 포기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김치라는 이름 안에 얼마나 넓은 세계가 있는지 알게 됐다. 아삭한 깍두기, 순한 백김치, 국물이 일품인 동치미는 서로 전혀 다르지만 모두 채소와 소금, 미생물과 시간이 함께 만든 음식이다.
김치는 빨간 배추김치 한 가지가 아니다. 매운맛이 부담스러워졌다고 김치와 작별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몸과 입맛에 맞는 한 그릇을 찾으면, 김치는 여전히 밥상 곁에서 익어가는 살아 있는 음식으로 남는다.
이 글은 개인의 식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생활 에세이입니다. 김치의 유산균과 발효 특성은 제품, 재료, 제조법, 숙성 온도와 기간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정 질환의 예방이나 치료를 위한 의학적 조언이 아니며, 매운 음식이나 염분을 제한해야 한다면 의료진의 안내를 우선하세요.
참고: 한국 발효식품과 김치의 유산균 연구 리뷰 · 발효식품과 프로바이오틱의 구분에 관한 전문가 합의문 · 미국 NIH 프로바이오틱 소비자 자료 · 질병관리청 나트륨 섭취 안내
